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나이 마사유키 (문단 편집) === [[롯데 자이언츠]] === 그러다 1984년 시즌 종료 후에 [[재일 한국-조선인|재일 한국인]] 신분으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했는데, 오랜 일본야구 경험을 안고 뛰어든 한국프로야구에서 그런대로 괜찮은 구위를 보여주었지만 일본에서 중간계투로만 뛰어오다 보니 선발로 나선 한국에서 스테미너의 문제를 보여왔다.[* 지금도 선발로 200이닝을 던지면 많이 던지는 축에 속하지만 당시의 한국의 에이스들은 그정도 이닝을 소화하는 것이 당연했는데 김정행은 4년동안 한결같이 100이닝 정도밖에 소화를 못했기 때문이다.] 1986년 6월 5일, 김정행은 부산 사직야구장에서 당시 [[빙그레 이글스]]를 상대로 8대 0으로 이기면서 '''프로야구 사상 두 번째 [[노히트 노런]]을 기록했다.''' 김정행은 사사구를 4개나 내줬지만 삼진 5개를 같이 잡았다. 투구수는 106구.[* 빙그레의 [[배성서]] 감독의 변명은 이랬다고 한다. '''"스트라이크를 던져야 치지. 계속 볼만 던져 대니 칠 수가 있어? 볼넷만 8개잖아."''' 하지만 [[http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6060600209205010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86-06-06&officeId=00020&pageNo=5&printNo=19901&publishType=00020|당시 동아일보 기사]]나 [[한국야구위원회|KBO]] 레코드북에 따르면 사사구 4개만 허용했다고 나온다. 그만큼 볼질이 심했다 정도로 해석하면 될 듯.] 그런데 같은 날 열린 [[1986 FIFA 월드컵 멕시코]] 불가리아전에서 우리나라가 [[김종부]]의 동점골로 1대 1로 비겨 16강행에 한 가닥 기대를 걸고 각 신문이 온통 그 기사로 도배를 하는 바람에 김정행의 노히트노런은 아예 기사도 없이 제목으로만 간단히 처리당하는 비운을 겪고 만다. 김정행의 노하우를 높이 산 롯데는 [[1987년]]부터 플레잉코치로 기용하려는 시도를 했지만 그 당시 절대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롯데의 에이스 [[최동원]]과 '''사이가 너무 나빠서''' 안타깝게 무산되고 말았다.[* 김정행은 최동원의 부친 최윤식 씨가 보여준 열성적인(혹은 과잉) 아들 관리에 대해서도 "저 사람(최윤식 씨)은 코치도 아니면서 왜 연습장에 들어와 있는거냐?"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